신항로 개척의
배경, 전개
sp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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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아라비아, 비잔티움제국,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통한
중계 무역으로 동양의 향신료는 귀중품이었지만
비잔티움 제국을 오스만 제국이 함락시킨 후
당시 유일한 향신료 무역료를 장악한 뒤
세금을 매겨 향신료 가격이 더욱 오르고
(*오스만 제국과 향신료 가격 상승은 관련이 적다는 반론도 있다.)
동방과 직접 교역하여 저렴한 가격에 향신료를 얻고자 하였고
신항로 개척에 나선다.
유럽의 변두리였던 포르투갈은
땅도 척박하여 농업생산력도 낮아
상업중심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 결과 영토를 늘리려 하지만
포르투갈로썬 유럽 대륙 중심으로 나아가기엔
국력이 부족해
대서양과 아프리카로 신항로 개척에 나아간다.
그과정에서 엔히크 왕자가
신항로 개척의 이익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또 대서양 섬에서 밀과 사탕수수를 재배하며 수익을 얻는등 성과를 거뒀다
그후 향신료 무역을 하기 위해,
보자도르 곶 이후를 탐사하기 위해,
사제왕 요한 전설에 나오는 기독교왕국과
힘을 합쳐 아시아에 도달할 수 있는지
알아내려했습니다.
portugal
1492년 코르도바가 수도였던 후우마이야등의 이슬람국가를
7세기 반에 거쳐 로마 카톨릭 국가들이 이슬람 국가를 멸망시키고
정복해 카톨릭 국가의 영토를 회복하였는데 이를 레콩키스타라고 부른다.
레콩키스타가 1492년 끝나고 여유를 가진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따라
신항로 개척에 투자를 하기 시작하고 서아프리카 해로를 독점한 포르투갈을 피해
인도에 도달하기 위해 콜럼버스에게 투자하고 콜럼버스의 항해가
포르투갈의 신항로 개척에 불씨를 지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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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in
해도
바다의 깊이나 항로, 암초의 위치 바람의 방향 등을
표시한 항해용 지도인 해도가 발명되었다.
캐러벨선
캐러벨선은 아랍 제국의 다우를 응용해
포르투갈인 들이 개발했다.
배의 신뢰도가 높고 적은 인원으로도
원활히 항해가 가능하고 속도가 빨랐다.
하지만 본래 어선이었기 때문에
내구성이 떨어지고 적재용량도 크게 떨어졌다.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점점 대형화 되었지만
결국 새로 개발된 캐럭에 대체되었고
지중해 근처를 항해하는 선박으로 자리잡게 된다.
Sleeswyk, André W. (1998). "Carvel-planking and Carvel Ships in the North οf Europe ",
나침반
중국 송나라에서 발명된 나침반은
이슬람을 통해 중세 유럽으로 전해진다.
아스트롤라베
고대 그리스의 히파르쿠스와 프톨레마이오스등에게서
기원된 아스트롤라베는 기능이 적었다.
하지만 8세기 중엽 이슬람 세계에 전해지고
이후 13세기가 지나도록 이슬람 세계에서 발전되었고
이후에는 1000가지가 넘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이슬람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면서 유럽세계로 전해지고
이는 신항로 개척에 큰 도움을 준다.
Evans, James (1998). 《The History and Practice of Ancient Astronomy》. Oxford University Press
엔히크 왕자는 신항로 개척의 이익 가능성을 깨닫고
포르투 산투, 마데이라 섬등을 발견해
밀과 사탕수수등을 재배하여 이익을 얻는다.
이를 본 이사벨 1세가 콜럼버스에게 후원을 해
바하마 제도에 상륙한다,
즉 오늘날의 아메리카 서인도 제국을 발견 하였다.
이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2차례의 탐험을 하였 아메리고 베스부치가 인도가 아닌
신대륙이란것을 발견하고
그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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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bus
당시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것을
모르는것이 아닌
콜럼버스의 거리를 구한 방식이
틀려 반대하였다.
토르데시야스 조약,
마젤란의 세계일주
교황 알렉산더 6세와 각국의 군주가
멋대로 서쪽은 스페인 동쪽은 포르투갈 땅이라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맺어진다.
이후 포르투갈의 왕위가 스페인 왕에게 넘어가고
이베리아 연합이 생겨나자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또 마젤란이 두번의 항해에 걸쳐
세계일주를 거의 성공하였다.
비록 필리핀에서 전사하였지만
최초의 세계 일주자로 간주한다.
이후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가
세계일주를 완전히 성공한다
Tordesillas
희망봉
남쪽 항로 개척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은
서쪽으로만 가려한 콜럼버스와 달리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를 가려 하고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도달하는 항로를 개척하였다.
Cape of Good Hope
이후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점령하고
프란체스코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점령하기도 한다.
이후 이베리아 반도가 아닌
다른 유럽 국가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고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등은
본래의 강한 해군으로
신항로 개척에 참가하게 된다.
북아메리카도 탐사하고
희망봉과 남미 밑으로 돌아가는 항로가 아닌 북극을 통해 아시아에 도달하려는 항로를
찾으려 하다 실패하고
북극을 탐험하고
오세아니아를 발견하고
러시아는 동쪽으로 탐험해
태평양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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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항로 개척의
결과
여러 서유럽 국가들이 신항로 개척에 뛰어들고 아메리카, 아시아의 지역들을 손에 넣자
서유럽에 향신료, 면직물이 저렴한 가격에 들어오고
감자, 옥수수 등의 구황작물과 담배와 금, 은 등도 들어와
무역의 중심지가 대서양으로 바뀌고 서유럽은 풍요를 누린다
그 결과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와 오스만 제국은 쇠퇴한다.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는 상당량의 금 광산을 찾아냈고,
에스파냐의 코르테스나 피사로는 멕시코와 페루를 정복해 많은 금과 은을 빼앗았다
많은 부를 구축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유럽의 최강국이 되고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을 합병하고
광대한 식민지를 거느리는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은 무역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중국에 상당량의 은이 유입되었다.
유럽은 소,말,양을 신세계로 데려와
담배, 감자, 옥수수등과 물물교환하고
미 대륙은 사탕수수,면등도 물물교환 했다고 한다.
북미, 호주, 아르헨티나 같은 지역에선 원주민이 학대를 당하고
땅에서 쫓겨나 소수민족으로 축소되었다.
유럽 강대국에 의한 영향력은
제국주의의 발전과 백인 우월주의와 서구 중심주의를 야기하였다.
유럽 경제의 중심지는 지중해에서 서유럽으로 변화되었다.
다양한 국가의 특산품이 유럽 시장에 진출해
기존 유럽 생산 시장은 정체 되었다.
돈이 부족 했던 유럽 전역으로 은화가 갑자기 퍼져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고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수입에만 의존해
결국 1557년 파산한다.(가격 혁명)
인플레이션의 영향 중 임대료가 하락해
일부 영주는 임대된 땅을 소작농에게 팔고
이로 인해 소규모 토지 소유 농부들이 생겨났다.
그결과 봉건 사회의 붕괴가 야기 되었고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었다.(상업 혁명)
주식회사가 만들어진 과정은
17세기 유럽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고
투자 받은 돈을 어떻게 다시 되돌려 줄까 하다가
자금에 대한 회사의 소유권을 나타내는
권리 증서를 만들게 되고
이것이 주식회사의 시작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주식을 거래 하기 위해
주식거래소도 생겼다.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시가총액은
현재의 화폐 가치로 따질때
무려9035조나 된다고 한다.
개척의
신항로
결과
유럽 여러나라는 원주민을 동원하여 금, 은 광산과
탕수수 대농장등을 운영하였지만
노동 착취와 전염병 등으로 원주민 인구가 감소하여면포와 무기등을 흑인 노예와 교환하고
아메리카와 카리브 제도등에
흑인 노예를 노동시켰다.
목화, 설탕 담배, 당밀, 럼주등을 유럽으로 보내진다.이를 삼각 무역 이라 한다.
삼각 무역은 유럽 본토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수익성이 높아 400년 가까이 성행하였다.
삼각무역
신항로 개척의
원주민,기타
아즈텍 제국의 멸망
에르난 코르테스가 1504년 알론소 퀸테로의 배를 타고
아즈텍 제국에서 전투를 벌였고
아즈텍제국의 수도 테노치 티틀란에 가는길에
아즈텍의 동맹도시 촐룰라에 도착하는데
마야계열 부족에서 말린체를 얻고
통역으로 쓰고 있었지만
말린체가 코르테스 에게 촐룰라가 스페인이 잠든 틈에
제거 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하니
코르테스는 촐룰라 학살을 감행한다.
촐룰라 학살이 테노치티틀란에 전해지자
아즈텍의 황제 몬테수마 2세에게 전해지고
황제는 이들을 환영하기로 한다.
하지만 에르난 코르테스는
몬테수마 2세를 인질로 황금을 얻는다
이후 주위 부족들의 아즈텍에 대한 원한을 이용해
에르난 코스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점령한다.
아즈텍이 완벽히 멸망한 이유는
에르난 코르테스 보다
동맹군의 원한 때문 이라고 한다.
aztec
Tawantinsuyu
Tawantinsuyu
잉카제국의
본래의 명칭은
타완틴 수유이고
잉카라는 명칭은
타완틴 수유의 군주,
즉 사파 잉카에서 따온것이다
먼저 잉카제국에는 형제인 우아스카르를 내쫓고
황제가 된 아타우 알파가 있었다
1530년 출발한 프란치스코 피사로의 군대는
1531년 초반 잉카제국에 도착하게 된다.
이때 도시, 툼베스에 이르는데
당시 잉카는 내전으로 거의 사직위허하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피사로는 곧바로 잉카제국의 중심으로 나아가고
아타우알파는 아무런 군장을 갖추지 않고
스페인인들을 맞이한다.
아타우알파는 스페인들한테 포로로 잡히고
이때 아타우알파는 작은 방 하나를 채울만큼의 금과
그 두배의 은을 스페인 사람들에게 제공했지만
압해되지 않고 교수형에 처해 운명한다.
wantinsuyu
스페인의 점령군은 아메리카를 점령하던
큰 제국에 불만을 품은 원주민과 동맹을 맺어
이용했고 천연두, 홍역, 인플루엔자, 황열병 등으로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이 더욱 쉬워졌고
그 결과 90% 이상이 절멸하였다.
스페인이 아메리카 문명의 문화재나 기록물등의
사료를 파괴하여 고고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다.
아즈텍 제국은 인신공양이 성행하였는데
포로나 심지어는 같은 아즈텍인들까지도
피라미드 위에서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어 제단에 바치고 먹는다
그후 피라미드 아래로 굴린다.
아즈텍 인들은 피라미드 밑에 떠내려오는
망자의 흔적을 온몸에 펴바르고
축복을 고대하였다고 한다.
이후 식물을 간 가루와 혈핵을 섞어
신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인신공양을 저지르며
대상의 비명을 악기로 쓰며 인간농장을 운영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피가 나오고 남은 육신을, 먹는것을 축복이라 하였다.